삶의 유비, 심의적인 고도(孤島)


고충환 / 미술평론


거의 흑백의 모노톤에 가까운 단조로운 화면에는 허허로운 여백과 함께 그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이미지들이 부유하듯 화면 위를 떠다니고 있다. 이렇듯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여백을 막막한 공기층으로서, 그리고 이미지들을 공기층 사이사이로 야트막한 등선을 내민 섬들로서 읽혀지게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이끼낀 돌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작가 장현재의 그림이 애초에 이런 구상적인 접근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최소한의 구상적인 이미지를 제외한다면 실제를 재현하고자 한 어떤 욕구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최소한의 구상적인 이미지가 암시하는 실제하는 자연과의 연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삶의 속성으로서 교감한 자연에의 인상이 무의식적인 지층을 이룬 어떤 경계 정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여백은 막막한 공기층의 실제 묘사임과 동시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작가의 내면 심상을, 그리고 막막한 존재 곧 어떤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형상(eidos)에 이르려는 그리움과 소망을 상징하는 기호가 될 것이다. 또한 여백에 그려진 이미지들은 이런 내면 심상이나 절대적인 형상을 대면한 작가의 삶의 속성을, 편린들을 상징할 것이다.
 

어느 경우이건 작가의 그림에 대한 이런 독해는 자연에 대한 작가의 관계가 그저 표면적인 인상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심의적인 형상에, 근원적인 형상에 결부되어진 것임을, 그럼으로써 명상적인 지평을 향해 열려진 것임을 말해준다. 이로써 섬으로 읽은 최초의 독해는 이렇듯 심의적인 형상을, 근원적인 형상을 향한 작가의 자기반성적인 성찰 곧 지향성을 지시해주는 한 상징임이 드러난 셈이다. 아마도 이런 상징으로서의 섬에 대해 ꡐ심의적인 고도(孤島)라는 말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도, 이 말은 홀로 외떨어진 섬을 뜻한다. 외떨어진 섬의 지리적 여건에 대한 감정이입으로서 삶의 속성을 대입시킨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군집을 이룬 섬이 없지 않지만, 삶의 유비(類比)로서의 섬은 아무래도 이렇듯이 외딴 섬이 정서적으로 공감케 하는 울림이 크다. 최근에 이 말은 정체(定體)를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고유의 주체성을 지시하는 동시에 그만큼 자기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폐역적인 지정학적 속성을 의미하며, 탈정체란 말을 견인해내기도 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은 예로부터 섬으로 대변되는 자연이 인간의 삶의 물리적인 속성 뿐 아니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나아가 시적 이미지즘으로 정의할만한 심의적 지층과도 긴밀하게 관련해 왔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감정이입으로서 인간화한 섬을 고도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해석한, 그럼으로써 삶의 일부로 편입된 자연을 자연성이라 한다. 이런 자연성 곧 자연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주요한 동인 가운데 하나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장현재에게서 자연성은 자연의 물리적 표면을 넘어 보다 근원적인 형상에 이르려는, 인물동기(人物同氣)의 계기로서 자연과 인간이 내재한 성질의 동일시에 이르려는 강력한 욕구의 한 징후에 다름 아니다.
 

작가의 최근 그림들은 구체적인 풍경을 연상시키는 화면에서 심의적인 상징으로서의 섬 곧 고도의 형상화에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섬을 연상하게 하는 이런 특유의 형상은 어떤 필연적인 계기로서보다는 어느 날 그저 무심결에 작가를 찾아 왔다고 한다. 이런 작가의 증언은 그 형상의 근원을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로서보다는 무의식적인 지층을 이룬 일종의 원형적인 형상에의 지향성으로 유추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 형상이 갖는 상징적 심의적 의미는 이런 고도 이외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여성성 고유의 생명 현상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생명을 함축하고 있는 알(역시 생명을 함축하고 있는 대지의 또 다른 상징인)에 대한 모성애의 무의식적 발현이 될 것이다. 또한 그 형상은 이렇듯 알을 품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집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 집은 그저 물질적 형태를 갖는 외형적 개념이기보다는 근원 형상 같은 것, 이를테면 작가의 존재보다 훨씬  이전부터 유래한 인간 본연의 그리움 혹은 본향에의 귀소성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듯 형상을 생명의 메타포로 읽는 것은 실제로 작가의 그림에서 여백이 양수(우주의 기의 상징이기도 한)를, 그리고 형상이 그 양수로부터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는 생명의 씨앗을 연상시키는 탓이다.
 

고도이건 생명이건 이런 근원 형상에 대한 그리움 곧 지향성은 어딘가에ꡑ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법한 'somewhere'라는 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모든 그림은 어김없이 이 명제 하에서 그려진 것들이다. 이는 작가의 그림이 ꡐ근원 형상에의 지향성을 이미지화한 것임을 명료하게 드러내준다. 그 그리움이 다름 아닌 근원 형상 곧 무한한 존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정서와 관념은 상당한 정도로 낭만주의의 향수에 기대고 있다.
 

향수는 본질적으로 과거지향적인 귀소성의 것이다. 향수는 관대하다. 향수는 어떤 아픔조차도 즐김의, 탐닉의 심리적 상태로 전이시키는 미약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향수는 일종의 결핍의, 결여의 형식으로서, 그 결여의 빈 공간이 여백이다. 향수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아이러니로서만 존재한다. 결여의 형식으로서 현실을 몰입시키기 때문이다. 과거를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온통 지배하는 이런 불구의 속성으로 인해 향수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이며, 삶의 실제와 비교되는 비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작가에게서 이런 비현실적인 존재는 삶의 저편 어딘가에 있을법한 근원 형상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작업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본질론자의 세계관에, 기질에 기울어져 있다.
 

고도로부터 유추해낸 삶의 메타포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적막감이 감도는 정적인 화면과 함께 동양적인 관조의, 명상의 심의적 세계로 이끈다. 고도는 자연의 표면을 넘어 근원 형상에 이르려는 작가의 향수를 이미지화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생명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여성적인 감수성과 심성의 무의식적 발현이기도 하다.